[점거, 새로운 거버먼트]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으로부터 침대 밑의 책

: 2008년 촛불시위때의 경험과 비슷한 지점들. 
운동의 시작. 그리고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 직접민주주의. 비폭력 등 여러 지점에서 되새겨 볼만한 내용들이 많음. 



-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채무란 약속의 전도. 그것은 수학과 폭력에 의해 변질된 약속"
<채무,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주류 경제학 이론에 따르더라도 채무를 꼭 갚아야 하는 건 아니다. 

- 운동은 수단인가? 
결국 운동 속에서 제기되는 물음은 표상된 목표에 얼마나 다가갔느냐가 아니라, 운동 속에서, 흐름 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고 증폭시킬 것이냐이다. 강약과 리듬을 만들고 때로는 거기에 변조를 가하면서 끊임없는 멜로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노래의 끝 음표가 그 노래가 추구한 목표가 아니듯이, 중요한 것은 어떤 지속을 만들어 내느냐에 있지 그것이 어디에서 멈추첬느냐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운동에는 정말로 예술적 기예가 필요하다. '과정'이 작품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과정 끝에 작품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과정'을 목적에서 구원하라. '과정'을 최대화하라. 

- 욕망의 해방과 금욕
더 이상 참지 말고 이제 요구하라 / 탐욕에 반대한다면 먼저 네 욕망을 비워라
욕망과 운동, 욕망과 해방
월스트리트가에서 단식투쟁하는 리자이. "자립의 출발점. 월가를 깨끗하게 만들기 전에 나 스스로를 먼저 깨끗하게 만드는 거죠. 일종의 자기 거버먼트"
자본주의적 욕망의 결핍을 채우기보다 자본주의적 결핍의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욕망을 충족시키기보다 욕망을 교체하는 것의 중요성이 분명히 존재. 
욕망의 해방이란 그것의 양적인 분출이 아니라 질적인 진화. 현재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욕마아기보다 현재와 다른 삶을 욕망하는 것이 더 중요. 

- 폭력적이 아니라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 
어디까지 나아가느냐. 맑스의 말처럼 '급진적'이라는 것은 뿌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의 표현으로는 백지상태에 이르는 것. (파농이 말한 폭력의 의의는 사르트르가 붙인 서문에서 유명해진 문장 '유럽인을 쏘아 죽이면 일석이조'라는 식의 '살기'에 있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의 뿌리를 바꾸려고 하는, 과도기 없는 '절대적 대체'를 주장한 '비타협성'에 있다. 그가 말한 폭력은 위협성 수단이라기보다는 존재의 절대적 변형 그 자체)
단 한 사람듸 고집, 단 한 사람의 외침이 수만, 수십만의 위협적인 힘보다 급진적일 수 있다. 여기서 폭력은 수단으로든, 목적으로서든 고려되지 않는다. 

- 운동의 전파와 번역
"내년 총선에서 한미 FTA막는 야당 밀어주시죠"라는 발언에 "그런 담론으로 투쟁이 확대되기는 커녕 망한다. 다른 세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왜 우리 자신이 저항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가를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얘기한 대학생. 
우리는 운동을 전달하고 증폭시키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흡수하고 중단시키는 과정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보여준다. 운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운동한다는 것이며, 그만큼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세계를 이동시킨다는 것이다. 각자 모두가 파장 즉 운동을 통과시킴으로써 스스로 전달의 매체, 증폭과 번역의 기계처럼 작동한다. 즉, 우리는 바로 그런식으로 하나의 운동에 참여. 우리는 한진중공업 크레인에 올라가고, 강정마을을 지키러 가면서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고 자기 세계를 변화시킨다. 

- 무엇을 남겼는가? 
운동의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집권이나 제도화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운동은 그 자체로 이동이자 변화이므로 결과가 즉각적이고 동시적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운동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면 그것이 그 자체로 변화이고 운동의 결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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